전태일을 찾아서

전태일의 발자취

<p class='photo_title'>전태일의 친구, 조영래</p><p class='photo_content'>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었을 때, 전태일의 수기와 어머니의 증언으로 전태일 평전을 집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간이 불허되어 1978년 일본에서 첫 발간이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최초 발간되었다.</p>

전태일의 친구, 조영래

<p class='photo_title'>이소선, 태일이와의 약속</p><p class='photo_content'>"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 "아무 걱정마라.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께" 전태일은 숨을 거두기 전, 이소선 어머니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꼭 이루겠노라 약속했고, 그 약속은 어머니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었다.</p>

이소선, 태일이와의 약속

<p class='photo_title'>나는 돌아가야 한다</p><p class='photo_content'>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p>

나는 돌아가야 한다

<p class='photo_title'>근로기준법 화형식</p><p class='photo_content'>전태일은 11월 13일, 오후 1시로 거사를 결정하고 그의 일기장 노트 여백 한 페이지에 '시위계획서 초안'을 작성했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위해 책에 휘발유를 끼얹고 점화하기 직전 자신이 연설대 위에 올라가서 시위를 진행하여 거사의 포문을 열겠다는 계획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결단을 내렸다.</p>

근로기준법 화형식

<p class='photo_title'>1970. 10.7 경향신문</p><p class='photo_content'>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경향신문 보도 경향신문 석간 사회면에 평화시장 실태보도와 사장 면담투쟁, 노동청 진정과 시위투쟁이이 보도되었다.</p>

1970. 10.7 경향신문

<p class='photo_title'>모범업체 태일 피복</p><p class='photo_content'>전태일은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매번 좌절되자 모범적인 업체를 직접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25매의 사업계획서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시장조사에서부터 광고, 생산제품, 임금, 편의시설 등 오늘날에도 합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사업계획안으로 평가받고 있다.</p>

모범업체 태일 피복

<p class='photo_title'>1970년대 중반 어느 시다의 일과표</p><p class='photo_content'>평화시장 실태조사서에는 시아게 점원의 연령별 직책에서 직업병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p>

1970년대 중반 어느 시다의 일과표

<p class='photo_title'>전태일의 현실</p><p class='photo_content'>평화시장 실태조사서에는 시아게 점원의 연령별 직책에서 직업병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p>

전태일의 현실

<p class='photo_title'>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p><p class='photo_content'>전태일은 '바보회' 회원을 비롯한 12명의 재단사와 함께 '삼동회'를 결성했고, 그 첫 사업으로서 평화시장 실태 재조사에 들어갔다.</p>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p class='photo_title'>전태일의 실천</p><p class='photo_content'>전태일은 '바보회' 회원을 비롯한 12명의 재단사와 함께 '삼동회'를 결성했고, 그 첫 사업으로써 평화시장 실태 재조사에 들어갔다. 실태조사 결과물을 정리하여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로 제출했는데, 다음 날인 1970년 10월 7일 최초로 그 참상이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p>

전태일의 실천

<p class='photo_title'>1969.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 조직</p><p class='photo_content'>고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아버지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전태일은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고 회원들과 노동법을 공부하며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p>

1969.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 조직

<p class='photo_title'>전태일의 풀빵</p><p class='photo_content'>밥값이 부족해 굶는 일이 다반사였던 어린 시다들을 위해서 전태일은 밤늦도록 일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아침에 어머니에게 받은 차비 30원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시다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청계청6사부터 도봉산 아래 집까지 2시간 이상을 걸어서 귀가했다.</p>

전태일의 풀빵

<p class='photo_title'>1966. 재단사 전태일</p><p class='photo_content'>1966년 전태일은 미싱사가 되자마자 일터를 옮겨 한미사의 재단보조공이 된다. 월급은 7천원에서 3천원으로 줄어들었지만, 재단사가 되어야 어린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p>

1966. 재단사 전태일

<p class='photo_title'>전태일의 눈</p><p class='photo_content'>어린 소녀들. 열둘 열세살. 평균 나이 열다섯 살. 입에 풀칠하기 위해, 오빠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 전태일은 그들을 자주 목격했다. 배고파서 몸이 아파서 엄마가 생각나서 우는 아이들을. 환기시설 하나 없는 작업장에서 점심을 제때 먹지 못하고 15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시다들을.</p>

전태일의 눈

<p class='photo_title'>1964.2 어머니를 찾아 막내 순덕이를 업고 무작정 상경</p><p class='photo_content'>1년 동안 구두닦이, 신문팔이, 빈병줍기, 하드장사, 우산장사, 껌팔이, 휴지팔이, 리어카 뒤밀이, 담배꽁초 줍기 등을 하며, 노숙생활 끝에 남산동 50번지에 판잣집 전세방을 얻어 생활했다. 그리고 1965년 서울에서 온가족이 재회했으며 평화시장 삼일사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후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하여 참혹한 노동현실을 개선하고자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p>

1964.2 어머니를 찾아 막내 순덕이를 업고 무작정 상경

<p class='photo_title'>1961.8 대구로 돌아온 전태일</p><p class='photo_content'>전태일을 제외한 아버지와 나머지 식구들은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경북여고 근처 큰집에 얹혀 생활했다. 1962년 전태일은 서울에서 가출 생활을 끝내고 대구 가족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64년 설날 아침, 어머니는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게 되었다.</p>

1961.8 대구로 돌아온 전태일

<p class='photo_title'>1954.10 남대문시장 옆 천막촌에 거주</p><p class='photo_content'>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산으로 이사와 일거리를 찾아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며 남포동 자갈치 시장 안 골목에서 어머니와 임시로 한뎃잠을 자며 생활함. 1954년 서울로 옮겨와 서울역 염천교 부근 주택가에서 남의 집 처마살이를 했고 이후 남대문 시장옆 천막촌에서 거주하였다.</p>

1954.10 남대문시장 옆 천막촌에 거주

<p class='photo_title'>1948.8.26 출생</p><p class='photo_content'>경북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서 출생</p>

1948.8.26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