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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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안병헌
직업 형틀목수

형틀목수.jpg

 

안병헌입니다. 건설현장에서 나무 형태를 짜는 일을 하는 형틀목수예요. 36살 때인가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까 20년이 훨씬 넘었죠. 오래전 아이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생계를 책임져야 해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어요.

노조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지금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광주전남건설지부 소속입니다. 형틀목수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종필 동지를 만났어요. 그분하고 계속 팀을 짜서 일을 해오고 있죠. 처음 일 시작할 때는 배우는 때잖아요? 그래서 잘 못 하는 경우도 많았죠. 그때 그분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지금은 조금씩 웬만한 건 다 하게 됐네요. 노조도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지금 그분은 노조 간부로 있고, 저는 2분회 소속으로 있죠.

건설지부 내 조합원은 약 800여 명쯤 돼요. 그중 여성은 나 혼자고요. 건설현장에서도 여성노동자는 드물어요. 간혹 다른 현장에는 여성노동자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만난 적은 없어요. 심부름하거나 간단한 일을 하는 여성들은 있죠. 그런데 목수를 하는 분은 아직 못 봤어요.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도 없었고요.

이쪽 현장 분위기가 그런 탓도 있어요. 아직도 ‘여성’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거든요. 어떤 곳은 여전히 여성을 평가하는 곳도 있어요. ‘여자가 이런 일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들인데, 저도 많이 당했죠.

지난번에도 다른 현장에 지원을 갔는데, 내가 여자라고 현장 소장이 뒤에서 다른 말을 했나 봐요. ‘여자는 원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그래서 다음 날부터 그 현장에 안 나갔어요. 다른 조합원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볼까 봐. 그럴 땐 노조 책임자들이 나서서 해결해줘요. 금방 해결됩니다.

그래도 서운한 점이 많죠. 내가 형틀목수 일만 30년 가까이 해오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아이 셋 다 대학에 보냈죠, 둘은 결혼도 시켰죠, 막내는 좋은 회사에 잘 다니고 있죠. 그런데도 이 현장에선 아직 그런 분위기가 남아있는 거예요.

현장에서 여성이라고 무시를 하니까 억울하죠. 여성이지만 나도 도면을 볼 줄 알고 남성들만큼 일하고요. 힘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만큼 머리를 더 많이 써서 일하거든요. 그런데 정작 일할 때는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떨 때는 대통령을 찾아가서 만나고 싶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소속된 현장에서는 그런 말이 못 나와요. 지금 일하는 곳도 그렇고요. 앞서 얘기한 사람있죠? 정종필 씨가 그런 얘기를 했대요. ‘정 못 미더우면 소장하고 안 여사하고 망치 들고 붙어봐라. 누가 이기나?’ 일할 때는 실력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가,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그런 말이 안 나와요.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게 돼요. 부지런히. 솔직히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내가 일을 더 잘하거든요? 그러니 돈도 더 받고. 돈을 받는 값어치만큼 일을 해줘야 하니 열심히 해요. 나는 회사가 살아야 우리도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일거리가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는 회사도 살고 우리도 살고, 그렇게 함께 일을 해야죠.

그러니까 우리가 일하다가 다쳤을 때도 회사가 그만큼 해줘야 해요. 지금 일하는 곳에서는 누가 일하다 다치면 본사에서 하청노동자까지 치료비를 다 해줘요. 예전에 일 시작할 때는 안전화도 안 신었어요. 그러니 못에 찔리는 경우도 허다했지. 그런데 지금은 안전화 신고 머리에는 헬멧도 쓰잖아요? 시대가 바뀌긴 했어요.

그런데 내가 작년에 크게 다친 적이 있어요. 그때 회사에서 많이 해주지는 않더라고요. 사람이 다칠 만한 장소가 아닌데, 갑자기 장갑이며 옷이 딸려 들어가면서 다친 거예요. 상처가 깊게 났어요. 피도 많이 났죠. 의사 말로는 다행히 뼈를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금이 가진 않았대요.

안병헌 건설산업연맹 광주전남건설지부 형틀분회 조합원. ⓒ 건설산업연맹 광주전남건설지부
안병헌 건설산업연맹 광주전남건설지부 형틀분회 조합원. ⓒ 건설산업연맹 광주전남건설지부

30년 가까이 일하면서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작년에 처음 팔꿈치를 다친 거예요. 다친 채로 일할 수는 없으니까, 몇 개월을 그냥 쉬었죠. 쉰다고 회사에서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뼈를 다친 게 아니라서 산재로는 얼마 안 나왔어요. 여름에는 보기 흉한데 성형도 인정해주지 않고. 그게 참 억울했어요.

현장에서 일 하면서 노동조합도 같이 쭉 했으니까, 기억에 남는 것도 많아요. 그중에 제일은 집회할 때 도로에서 그냥 잠자는 거. 광화문 쪽에서 1박2일로 집회를 하면 우리는 그냥 도로에서 누워 자요. 노조 하면서 집회는 다 따라다녔어요. 차 타고 광주에서 올라갈 때 음식을 다 싸서 가요. 우리도 가면서 먹어야 하니까, 우리도 살라고 하는 거니까. 그러다가 또 싸움 시작되면 가서 싸우고 그러죠. 단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함께 편이 돼서 행동하는 것. 회사에서도 우리 노조는 함부로 건들지 못해요.

일도 하고 노조 활동도 하고 그러면 사실 힘에 부치기도 해요. 그래도 노조 간부들이 힘에 맞게 해주시니까, 항상 똑같은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확실한 건 목수 일을 하면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전과 후가 굉장히 다르다는 거예요. 노조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빨간 날은 늘 휴일이에요. 유급으로. 일당도 단가를 정해놓고 일을 하고, 일거리도 정해 놓고요. 무엇보다 단체로 활동하면서 일도 부지런히 할 수 있고 무엇보다 힘을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좋죠. 함께 일하는 동지들이 있는 거니까.

어느 현장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일이 조금 서툴렀는지, 욕을 많이 먹었대요. 일이 조금 잘못됐으니까 그랬겠지만 조금 심했나 봐요. 그런데 자기도 갈 데가 없으니까 그냥 욕을 많이 먹고 그랬나 봐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건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노동조합으로 와라.’

 

 


  1. “대한항공이 좋아서, 노동조합을 하고 있어요”

  2. “우리를 지키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싸움으로”

  3. “조합원 모두 힘 있는 노동자… 신미지회의 목표예요”

  4. “교사도 ‘노동자’니까… 아이들의 노동자성을 키워주고 싶어요”

  5. “조금 더 목소리 내서, ‘나 봉제인이야’ 당당한 게 목표예요”

  6. “먼저 손 내밀면 좋겠어요, 노동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요”

  7. “아이들 미래 열어주고 찾아주는, 방과후수업 노동자입니다”

  8. “돌봄 영역의 모두가 소중한 노동자죠”

  9. “타투이스트가 한 명의 노동자로 인정받는 날이 오게 하고 싶어요”

  10. "우리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화장실이 낯설어서 실수하는 것 등을 눈높이에 맞춰 알려주면 어느새 다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모습을 봐요."

  11. "저도 기름에 데서 2주가량 산재를 쓴 적이 있어요. 그동안 기사님들이 산재를 쓴 적이 거의 없었대요."

  12. "가입자 불만이 풀릴 때까지 전화를 먼저 끊지 않으려고 하죠. 갑자기 끊어지면 불만신고가 접수되거든요."

  13. "객차를 점검하는 일부터 승차원 안내방송을 하고요, 어르신 등 승하차를 돕기도 해요."

  14. “마음건강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심리적외상에 노출될 때가 많아요.”

  15. “집을 청소하는 것과 다르게 학교는 통제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16. “처음에는 스타렌트카 소속이 아니고 용역업체 소속이었어요”

  17. “잡월드는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이잖아요? 그런데 가장 탄압이 심한 곳도 여기죠”

  18. “현장에서 여성이라고 무시를 하니까 억울하죠”

  19.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이 정확히 돼야 해요"

  20. “똑같은 재난에도 공무직은 위험수당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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